[토나카즈] 지는 꽃 아래
닌타마/단편 2012/05/14 18:44
현대학원물. 카즈미 주의♥
지는 꽃 아래
꽃이 지고 있다.
꽃잎이 하나, 둘, 팔랑거리며, 하얗게.
소녀는 멍하니 머리 위에서 얽혀 있는 꽃나무들을 올려다본다.
푸르른 잎사귀 사이사이로 송이송이 진 겹벚꽃과 라일락, 아카시아 꽃들.
그 꽃송이가 또 하나 바람결에 살랑살랑 떨어져, 소녀의 어깨에, 머리에, 그리고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진다.
소녀는 꽃이 진 바닥을 내려다본다.
흰 꽃잎들이 흩어진 바닥은 어두운 저녁인데도 꽃 색깔 때문에 어렴풋이 환한 느낌이 든다. 아니, 저곳보다는… 어둡지만.
바닥에서 시선을 들어 올려 바라보면, 눈앞 저편에 캠프파이어의 붉은 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 주위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 스피커를 울리는 커다란 노랫소리. 오월 축제의 후야제다.
소녀는 그 붉은 축제의 원에서 떨어져 먼 가장자리에, 꽃나무들 아래에 오도카니 혼자 앉아 있다. 축제의 집행부라, 낮 동안은 바빠 열심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뛰어다니다가, 그러다 지쳐 시름시름 현기증이 나 잠깐 저기 가서 쉬겠다고, 더워지는 햇살에 나무 그늘이 시원해 보여서, 여기 와 앉아 나무에 기대어 한 잠을 자고 났더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를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았구나, 하는 첫 깨달음이 스쳤을 땐 가슴이 덜컹,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아. 곧이어 중얼거렸다. 익숙하니까. 잊히는 것은 익숙하다. 사람들이 나를, 내 이름을, 내 말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익숙하니까. 괜찮아.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소녀는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고이고 눈을 감는다.
괜찮아. 카즈미, 괜찮아, 괜찮아.
마법의 주문처럼 수십 번씩 그 말을 되뇌며,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다. 천천히, 천천히, 울어버리지 않도록. 그 내쉬는 숨결에 향기가 난다. 남보랏빛 초저녁, 꽃숲의 향기가,
소녀를 둘러싼 세계의 공기에서는 차가운 향기가 난다. 마치 관 속에 누운 창백한 시체를 뒤덮은 흰 꽃처럼, 아니면 바다에 던져진 사람의 몸에 엉긴 흰 거품처럼, 소녀는 바다 아래 소리 없이 잠겨가고 있는 것만 같다. 빛도 비쳐들지 않는 깊은 바다 속 같은 곳에서, 작고 작게 찌부러진 물고기처럼, 빛도 내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에서 다만 숨 죽여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사는 세계는 그런 곳이야. 그러니까 나는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럴 수밖에는…….
눈물이 한 방울 스미어 나오려는 것을, 손등으로 얼른 닦아낸다. 고인 눈물이 쉽게 흘러나와 버리지 않도록, 무릎 위 손등에 턱을 고인다. 붉은 불이 일렁이는 번화한 풍경이 다시 바라보인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축제의 사람들, 소리들, 불길들, 노래들. 그렇지만 너는,
토나이.
하고 소녀는 입술을 벌렸다가,
소리 없이 다시 다문다.
그 애가 있다. 그 애가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애를 가리고, 스치고, 흘러가고, 그래도 소녀의 눈에는 소년의 모습이 선명하다. 소년의 이름은 소녀에게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익숙하고, 그래서 그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그 애의 모든 것을 되살려낼 수가 있으니까. 마치 네가 내 옆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그 애는, 토나이는, 자신 때문에 많이 귀찮고, 번거롭고, 힘들 테니까.
그 애는 책임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서, 아주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라서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유치원 소풍을 갔던 날을 기억한다. 너는 내 곁에 있어 주었다가 모두를 놓쳤지. 낯선 공원의 풍경이 두려워 울기 시작하는 내 손을, 꼬옥 잡고 걸으며 너는 내게 울지 말라고 했어. 울지 마, 바보야, 하고. 길에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곧잘 부딪치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며, 바보같이 눈물 글썽해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너는 딱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곤 했어. 이 울보야. 그래서 내가 웃으면, 너는 복잡한 표정으로 퉁명스레 휙 고개를 돌렸지. 토나이, 토나이, 하고 내가 부르면 너는 돌아보지 않고 저만치 앞서 걸어만 가다가, 내가 또 발을 헛디디면 이 덜렁아, 하며 손을 뻗어주었어. 미안해, 토나이. 나 때문에, 음악시험도, 가사 실습도, 체육 시험도 너는 늘 깍두기처럼 남는 나와 같은 조가 되어 주고, 그래서 함께 낮은 점수를 받아버리고 말아. 아침, 간혹 운 없게 자명종이 고장 나 늦잠을 잔 날이면, 네가 방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는 자전거 페달을 전속력으로 밟아 학교로 데려다 주곤 했지. 수업이 끝나고 썰물처럼 모든 사람이 빠져나갔을 때에도 너는 먼저 돌아가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어느 날엔, 교문까지 걸어가던 네가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며 교실로 달려온 적도 있었지. 나는 그때 창가에 앉아 있어서, 네가 운동장 저 끝으로부터 달려 돌아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어.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어. 조금 슬프고, 굉장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너는 그냥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어도 나는 괜찮았는데.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저 빈 복도로부터 너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눈을 꼭 감고 어떻게 너를 바라보아야 할까를 초조하게 생각했어. 너의 얼굴을 볼 것이 두려워서 가슴이 콩콩 뛰었어. 네가 입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볼 그 얼굴을, 생각하면 나는. 네가 기어이 교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내 심장은 교실 바닥에 쿵 떨어지는 것 같았어. 미안해, 토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너를 바라보면서 웃는 얼굴을 해 보였던 나를 기억하니. 웃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어. 너는 내가 우는 것을 싫어하니까. 토나이. 미안해, 토나이. 나로 인한 그 모든 일이, 지금까지의 많고 많았던 일들이 번거롭고 귀찮고 싫을 텐데도, 그 모든 고생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찾아와 주고 마니까, 미안해. 그래서 내가 이 차가운 꽃나무 아래서 소리 내어 불러볼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너를 나는 부를 수가 없어…….
붉게 일렁이는 저편에 보이는 소년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축제 때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소녀는 웅크려 앉은 채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어 가린다. 미안해. 미안해, 토나이.
거센 바람이 분다. 잎새와 꽃들이 우수수, 쓸려가는 소리가 난다. 꽃들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흐드러지듯 떨어진다.
…차라리 바람이 불어서, 더 많이, 아주 많이 불어서 이 꽃이 다 떨어져 버려서…… 나를 묻어버렸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바람이 오랜 시간 숲을 휩쓸 때까지 소녀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아무에게도, 너에게도 보이지 않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너를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는 듯이,
“바보야.”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소녀는 흠칫, 어깨를 떤다.
퉁명스러운 손이 눈을 가린 손 위에 겹쳐져, 손을 떼어낸다.
힘없이 허물어진 손 사이로, 소녀의 눈물 흥건한 눈동자가 소년을 올려다본다.
“왜 또 울고 있어.”
소년은 속상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소녀는 뿌연 시야 때문에, 또한 당황한 까닭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소년이 얼마동안 소녀를 찾았는지, 소녀를 보자마자 이곳까지 얼마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소녀가 지는 꽃의 소망을 빌고 있던 동안에, 그 앞에 서둘러 도달한 소년의 어깨가 이만치 들썩이도록 호흡이 가뿐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소녀가 중얼거린다.
“미안해…….”
소년은 대답 없이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우수수, 소녀의 머리에, 어깨에 쌓여 있던 꽃잎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무슨, 꽃사람이냐. 눈사람도 아니고.”
말하며, 소년은 소녀에게 쌓여 있는 꽃잎들을 털어내 준다. 소녀는 멍하니 소년의 손길 아래 서 있다.
소년이 소녀의 손을 쥐며, 말한다.
“가자.”
소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년의 손을 잡고 걷는다.
차가운 숲을 나와 붉은 축제의 한가운데로,
불길과 사람들, 노래 속으로 걸어간다. 한두 발 앞서 걸어가는 소년의 손을 잡고서.
소년은 소녀를 돌아보지 않는다.
화가 난 걸까, 소녀는 생각한다.
나는 너를 힘들게만 하는구나, 소녀는 생각하고, 참을 수가 없어져 눈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다시금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하면 네가 나를 돌아봐 줄까. 무슨 말을 하면 너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
용기를 쥐어짜내 소녀가 중얼거린다.
“미안해.”
대답이 없다.
소란한 축제의 소리만이 주변에 왁자하다.
“미안해, 토나이…….”
소녀는 다시 한 번 소년의 등을 향해 말해 본다. 소녀의 손을 쥐고 있는 소년의 차가운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간 것 같다. 이윽고 소년의 잠긴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런 말 하지 마.”
소녀는 소년에게 바싹 귀를 기울이며, 간절한 마음으로 소년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고, 묻는다.
“토나이, 화났어…?”
“…….”
소년이 얼핏 소녀를 돌아본다. 표정이 딱딱하다. 불길 때문인지, 그림자 때문인지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어쩌면 슬퍼 보이기도 한다. 소년이 말한다.
“차라리 고맙다고 해. 아니면…….”
다시, 소녀로부터 고개를 휙 돌리며 소년은 낮게 중얼거린다.
아니면……
그 혼잣말은 너무도 작아서 소녀의 귀에 들렸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어간다.
소녀는 타박타박 걸으며 생각한다.
너밖에는 없는데, 나에게는.
날 찾아주는 사람,
내가 불러도 되는 사람,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
손을 붙잡고 날 끌어가 주는 사람.
나에게는 너밖에 없는데……
.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모르겠어.
네가 잡아주는 이 손을 당연하게 여겨도 될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봐 나는 두려운데…
결국은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사라지게 될까봐 두려운데…
네가 나에게 질려버려서,
이제는 너무 힘들고 귀찮아져서,
더 이상은 네가 나를 돌아봐 주지 않을까봐 두려운데……
“토나이.”
소녀는 안타까이 소년의 손을 꼭 잡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기 싫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해, 그건 내 마음의 다가 아니야.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내 소망에 대한 사과밖에 할 수가 없는걸.
나에게서 떠나가지 말아줘.
나를 잊지 말아줘.
꽃 속에 묻혀가고 있던 나를 기억해 줘,
나를 찾아줘, 내게서 멀어지지 말아줘, 나와 함께 있어줘.
그런 이기적인 소망밖에는 없는데.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토나이……”
소년은 대답이 없다.
소녀는 밤처럼 새까만 소년의 머리카락을,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눈물이 다시 차오를 것만 같다.
너는 내가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다시 떨어지는 꽃처럼 고개를 숙이는 소녀에게, 드디어 소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거나.”
“…응?”
소년이 입을 열어준 것이 반갑고 기뻐서 소녀는 고개를 얼른 들어올린다. 소년은 여전히 고집스레 앞쪽만을 바라보고 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소란스런 축제의 소리 속에서 소년의 나직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이어 들려온다.
“그냥,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해봐.”
“하고 싶은 말?”
“미안하다는 말 뒤에 하고 싶은 말.”
“그건…….”
“네가 나한테 가장 바라는 거, 그런 말.”
“바라는… 거?”
“차라리 그런 걸 말해봐.”
소녀는 망설인다. 소년에게 잡혀 있는 한쪽 손이 작게 꼼지락거린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 손가락들이 망설이듯 배회하는 것을, 소년이 단단하게 다시 잡아 쥔다.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듯이. 그럼에도 여전히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소년에게, 소녀는 조심스레 묻는다.
“……말해도 돼?”
“그런 게 있으면.”
“있어. 있지만…….”
“이상한 거 아니면 얘기해 봐.”
“이상한 거 아니…… 아, 그치만……”
“이상한 거야?”
“……말하면, 나 싫어할 거야?”
“……들어 보고.”
소녀가 숨을 들이킨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
펑― 펑― 축제의 마지막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밤하늘에 터지기 시작한다.
심장 고동 같은 폭죽 소리와 쏟아지는 빛.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
내가 너에게,
“…평생, 이렇게 평생 나랑 같이 있어 줄래?”
소년이 고개를 휙 돌려 돌아본다.
펑― 펑―
점점이 떨어지는 불꽃 그림자 아래서,
너의 헝클어진 꽃색 머리카락에 점점이 묻어 있는 꽃잎들, 흙과 풀잎과 꽃잎으로 구겨진 옷자락을 꼭 쥐고서, 붉은 눈물자국이 흥건해 엉망인 얼굴로, 커다랗게 뜨여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 그 커다랗고 간절한 눈동자.
―평생 나랑 같이,
불꽃이 진다.
너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꽃과 같은 찰나, 시간들.
그리고
소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평생.
더보기
지는 꽃 아래
꽃이 지고 있다.
꽃잎이 하나, 둘, 팔랑거리며, 하얗게.
소녀는 멍하니 머리 위에서 얽혀 있는 꽃나무들을 올려다본다.
푸르른 잎사귀 사이사이로 송이송이 진 겹벚꽃과 라일락, 아카시아 꽃들.
그 꽃송이가 또 하나 바람결에 살랑살랑 떨어져, 소녀의 어깨에, 머리에, 그리고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진다.
소녀는 꽃이 진 바닥을 내려다본다.
흰 꽃잎들이 흩어진 바닥은 어두운 저녁인데도 꽃 색깔 때문에 어렴풋이 환한 느낌이 든다. 아니, 저곳보다는… 어둡지만.
바닥에서 시선을 들어 올려 바라보면, 눈앞 저편에 캠프파이어의 붉은 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 주위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 스피커를 울리는 커다란 노랫소리. 오월 축제의 후야제다.
소녀는 그 붉은 축제의 원에서 떨어져 먼 가장자리에, 꽃나무들 아래에 오도카니 혼자 앉아 있다. 축제의 집행부라, 낮 동안은 바빠 열심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뛰어다니다가, 그러다 지쳐 시름시름 현기증이 나 잠깐 저기 가서 쉬겠다고, 더워지는 햇살에 나무 그늘이 시원해 보여서, 여기 와 앉아 나무에 기대어 한 잠을 자고 났더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를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았구나, 하는 첫 깨달음이 스쳤을 땐 가슴이 덜컹,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아. 곧이어 중얼거렸다. 익숙하니까. 잊히는 것은 익숙하다. 사람들이 나를, 내 이름을, 내 말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익숙하니까. 괜찮아.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소녀는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고이고 눈을 감는다.
괜찮아. 카즈미, 괜찮아, 괜찮아.
마법의 주문처럼 수십 번씩 그 말을 되뇌며,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다. 천천히, 천천히, 울어버리지 않도록. 그 내쉬는 숨결에 향기가 난다. 남보랏빛 초저녁, 꽃숲의 향기가,
소녀를 둘러싼 세계의 공기에서는 차가운 향기가 난다. 마치 관 속에 누운 창백한 시체를 뒤덮은 흰 꽃처럼, 아니면 바다에 던져진 사람의 몸에 엉긴 흰 거품처럼, 소녀는 바다 아래 소리 없이 잠겨가고 있는 것만 같다. 빛도 비쳐들지 않는 깊은 바다 속 같은 곳에서, 작고 작게 찌부러진 물고기처럼, 빛도 내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에서 다만 숨 죽여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사는 세계는 그런 곳이야. 그러니까 나는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럴 수밖에는…….
눈물이 한 방울 스미어 나오려는 것을, 손등으로 얼른 닦아낸다. 고인 눈물이 쉽게 흘러나와 버리지 않도록, 무릎 위 손등에 턱을 고인다. 붉은 불이 일렁이는 번화한 풍경이 다시 바라보인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축제의 사람들, 소리들, 불길들, 노래들. 그렇지만 너는,
토나이.
하고 소녀는 입술을 벌렸다가,
소리 없이 다시 다문다.
그 애가 있다. 그 애가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애를 가리고, 스치고, 흘러가고, 그래도 소녀의 눈에는 소년의 모습이 선명하다. 소년의 이름은 소녀에게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익숙하고, 그래서 그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그 애의 모든 것을 되살려낼 수가 있으니까. 마치 네가 내 옆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그 애는, 토나이는, 자신 때문에 많이 귀찮고, 번거롭고, 힘들 테니까.
그 애는 책임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서, 아주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라서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유치원 소풍을 갔던 날을 기억한다. 너는 내 곁에 있어 주었다가 모두를 놓쳤지. 낯선 공원의 풍경이 두려워 울기 시작하는 내 손을, 꼬옥 잡고 걸으며 너는 내게 울지 말라고 했어. 울지 마, 바보야, 하고. 길에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곧잘 부딪치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며, 바보같이 눈물 글썽해진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너는 딱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곤 했어. 이 울보야. 그래서 내가 웃으면, 너는 복잡한 표정으로 퉁명스레 휙 고개를 돌렸지. 토나이, 토나이, 하고 내가 부르면 너는 돌아보지 않고 저만치 앞서 걸어만 가다가, 내가 또 발을 헛디디면 이 덜렁아, 하며 손을 뻗어주었어. 미안해, 토나이. 나 때문에, 음악시험도, 가사 실습도, 체육 시험도 너는 늘 깍두기처럼 남는 나와 같은 조가 되어 주고, 그래서 함께 낮은 점수를 받아버리고 말아. 아침, 간혹 운 없게 자명종이 고장 나 늦잠을 잔 날이면, 네가 방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는 자전거 페달을 전속력으로 밟아 학교로 데려다 주곤 했지. 수업이 끝나고 썰물처럼 모든 사람이 빠져나갔을 때에도 너는 먼저 돌아가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어느 날엔, 교문까지 걸어가던 네가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며 교실로 달려온 적도 있었지. 나는 그때 창가에 앉아 있어서, 네가 운동장 저 끝으로부터 달려 돌아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어.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어. 조금 슬프고, 굉장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너는 그냥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어도 나는 괜찮았는데.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저 빈 복도로부터 너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눈을 꼭 감고 어떻게 너를 바라보아야 할까를 초조하게 생각했어. 너의 얼굴을 볼 것이 두려워서 가슴이 콩콩 뛰었어. 네가 입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볼 그 얼굴을, 생각하면 나는. 네가 기어이 교실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내 심장은 교실 바닥에 쿵 떨어지는 것 같았어. 미안해, 토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너를 바라보면서 웃는 얼굴을 해 보였던 나를 기억하니. 웃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어. 너는 내가 우는 것을 싫어하니까. 토나이. 미안해, 토나이. 나로 인한 그 모든 일이, 지금까지의 많고 많았던 일들이 번거롭고 귀찮고 싫을 텐데도, 그 모든 고생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찾아와 주고 마니까, 미안해. 그래서 내가 이 차가운 꽃나무 아래서 소리 내어 불러볼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너를 나는 부를 수가 없어…….
붉게 일렁이는 저편에 보이는 소년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축제 때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소녀는 웅크려 앉은 채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어 가린다. 미안해. 미안해, 토나이.
거센 바람이 분다. 잎새와 꽃들이 우수수, 쓸려가는 소리가 난다. 꽃들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흐드러지듯 떨어진다.
…차라리 바람이 불어서, 더 많이, 아주 많이 불어서 이 꽃이 다 떨어져 버려서…… 나를 묻어버렸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바람이 오랜 시간 숲을 휩쓸 때까지 소녀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아무에게도, 너에게도 보이지 않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너를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는 듯이,
“바보야.”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소녀는 흠칫, 어깨를 떤다.
퉁명스러운 손이 눈을 가린 손 위에 겹쳐져, 손을 떼어낸다.
힘없이 허물어진 손 사이로, 소녀의 눈물 흥건한 눈동자가 소년을 올려다본다.
“왜 또 울고 있어.”
소년은 속상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소녀는 뿌연 시야 때문에, 또한 당황한 까닭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소년이 얼마동안 소녀를 찾았는지, 소녀를 보자마자 이곳까지 얼마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소녀가 지는 꽃의 소망을 빌고 있던 동안에, 그 앞에 서둘러 도달한 소년의 어깨가 이만치 들썩이도록 호흡이 가뿐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소녀가 중얼거린다.
“미안해…….”
소년은 대답 없이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우수수, 소녀의 머리에, 어깨에 쌓여 있던 꽃잎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무슨, 꽃사람이냐. 눈사람도 아니고.”
말하며, 소년은 소녀에게 쌓여 있는 꽃잎들을 털어내 준다. 소녀는 멍하니 소년의 손길 아래 서 있다.
소년이 소녀의 손을 쥐며, 말한다.
“가자.”
소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년의 손을 잡고 걷는다.
차가운 숲을 나와 붉은 축제의 한가운데로,
불길과 사람들, 노래 속으로 걸어간다. 한두 발 앞서 걸어가는 소년의 손을 잡고서.
소년은 소녀를 돌아보지 않는다.
화가 난 걸까, 소녀는 생각한다.
나는 너를 힘들게만 하는구나, 소녀는 생각하고, 참을 수가 없어져 눈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다시금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하면 네가 나를 돌아봐 줄까. 무슨 말을 하면 너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
용기를 쥐어짜내 소녀가 중얼거린다.
“미안해.”
대답이 없다.
소란한 축제의 소리만이 주변에 왁자하다.
“미안해, 토나이…….”
소녀는 다시 한 번 소년의 등을 향해 말해 본다. 소녀의 손을 쥐고 있는 소년의 차가운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간 것 같다. 이윽고 소년의 잠긴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런 말 하지 마.”
소녀는 소년에게 바싹 귀를 기울이며, 간절한 마음으로 소년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고, 묻는다.
“토나이, 화났어…?”
“…….”
소년이 얼핏 소녀를 돌아본다. 표정이 딱딱하다. 불길 때문인지, 그림자 때문인지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어쩌면 슬퍼 보이기도 한다. 소년이 말한다.
“차라리 고맙다고 해. 아니면…….”
다시, 소녀로부터 고개를 휙 돌리며 소년은 낮게 중얼거린다.
아니면……
그 혼잣말은 너무도 작아서 소녀의 귀에 들렸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어간다.
소녀는 타박타박 걸으며 생각한다.
너밖에는 없는데, 나에게는.
날 찾아주는 사람,
내가 불러도 되는 사람,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
손을 붙잡고 날 끌어가 주는 사람.
나에게는 너밖에 없는데……
.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모르겠어.
네가 잡아주는 이 손을 당연하게 여겨도 될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봐 나는 두려운데…
결국은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사라지게 될까봐 두려운데…
네가 나에게 질려버려서,
이제는 너무 힘들고 귀찮아져서,
더 이상은 네가 나를 돌아봐 주지 않을까봐 두려운데……
“토나이.”
소녀는 안타까이 소년의 손을 꼭 잡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기 싫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해, 그건 내 마음의 다가 아니야.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내 소망에 대한 사과밖에 할 수가 없는걸.
나에게서 떠나가지 말아줘.
나를 잊지 말아줘.
꽃 속에 묻혀가고 있던 나를 기억해 줘,
나를 찾아줘, 내게서 멀어지지 말아줘, 나와 함께 있어줘.
그런 이기적인 소망밖에는 없는데.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토나이……”
소년은 대답이 없다.
소녀는 밤처럼 새까만 소년의 머리카락을,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눈물이 다시 차오를 것만 같다.
너는 내가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다시 떨어지는 꽃처럼 고개를 숙이는 소녀에게, 드디어 소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거나.”
“…응?”
소년이 입을 열어준 것이 반갑고 기뻐서 소녀는 고개를 얼른 들어올린다. 소년은 여전히 고집스레 앞쪽만을 바라보고 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소란스런 축제의 소리 속에서 소년의 나직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이어 들려온다.
“그냥,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해봐.”
“하고 싶은 말?”
“미안하다는 말 뒤에 하고 싶은 말.”
“그건…….”
“네가 나한테 가장 바라는 거, 그런 말.”
“바라는… 거?”
“차라리 그런 걸 말해봐.”
소녀는 망설인다. 소년에게 잡혀 있는 한쪽 손이 작게 꼼지락거린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 손가락들이 망설이듯 배회하는 것을, 소년이 단단하게 다시 잡아 쥔다.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듯이. 그럼에도 여전히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소년에게, 소녀는 조심스레 묻는다.
“……말해도 돼?”
“그런 게 있으면.”
“있어. 있지만…….”
“이상한 거 아니면 얘기해 봐.”
“이상한 거 아니…… 아, 그치만……”
“이상한 거야?”
“……말하면, 나 싫어할 거야?”
“……들어 보고.”
소녀가 숨을 들이킨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
펑― 펑― 축제의 마지막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밤하늘에 터지기 시작한다.
심장 고동 같은 폭죽 소리와 쏟아지는 빛.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
내가 너에게,
“…평생, 이렇게 평생 나랑 같이 있어 줄래?”
소년이 고개를 휙 돌려 돌아본다.
펑― 펑―
점점이 떨어지는 불꽃 그림자 아래서,
너의 헝클어진 꽃색 머리카락에 점점이 묻어 있는 꽃잎들, 흙과 풀잎과 꽃잎으로 구겨진 옷자락을 꼭 쥐고서, 붉은 눈물자국이 흥건해 엉망인 얼굴로, 커다랗게 뜨여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 그 커다랗고 간절한 눈동자.
―평생 나랑 같이,
불꽃이 진다.
너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꽃과 같은 찰나, 시간들.
그리고
소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평생.
Fin.
(+)
-겹벚꽃은 산벚꽃이 지고 난 후 사월 후반~오월 초반에 핍니다. 일본 쪽은 개화시기가 좀더 빠를 것은 같지만요^//^
-카즈미가 먼저 프로포즈를 했네요 얼레리꼴레리...!라는 건 농담이고ㅎㅎ 카즈미가 토나이에 대해 갖고 있는 소망은 토나이가 카즈미에 대해 갖고 있는 만큼이나 절박하고 간절합니다. 그 속을 깊게 들여다보면요. 다만 토나이의 마음과 카즈미의 마음은 성질이 다르죠... 토나이에게 카즈미는 '사랑하는 여자아이'이고, 카즈미에게 토나이는 '소중한 친구', 그러니까, 소울메이트 같은, 카즈미에겐 운명의 패널티..ㅎ가 있다 보니까 남들보다 배는 더 절박하게 바라는, 너무도 필요한, 필수불가결한 사람이란 느낌이에요.
하지만 카즈미의 간절한 마음의 성질 역시, 토나이처럼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 토나카즈미는 해피엔딩이 될 거라는 말이에요. 절대로 해피엔딩!
-카즈미가 먼저 프로포즈를 했네요 얼레리꼴레리...!라는 건 농담이고ㅎㅎ 카즈미가 토나이에 대해 갖고 있는 소망은 토나이가 카즈미에 대해 갖고 있는 만큼이나 절박하고 간절합니다. 그 속을 깊게 들여다보면요. 다만 토나이의 마음과 카즈미의 마음은 성질이 다르죠... 토나이에게 카즈미는 '사랑하는 여자아이'이고, 카즈미에게 토나이는 '소중한 친구', 그러니까, 소울메이트 같은, 카즈미에겐 운명의 패널티..ㅎ가 있다 보니까 남들보다 배는 더 절박하게 바라는, 너무도 필요한, 필수불가결한 사람이란 느낌이에요.
하지만 카즈미의 간절한 마음의 성질 역시, 토나이처럼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 토나카즈미는 해피엔딩이 될 거라는 말이에요. 절대로 해피엔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