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렌] 당나귀 머리 이야기



당나귀 머리 이야기


코우스케는 생일에 큰 의미를 두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생일날 이딴 것을 쓰고 있어야 한다니, 하고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주위 애들이 큭큭거리면서 숨죽여 웃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이도저도 한심해져 책상을 발로 차 뒤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와, 그거 뭐야?"

의자에 삐뚜름하게 앉아 있던 코우스케가 고개만 틀어 친구를 올려다봤다. 삐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보면 모르냐?”

"왜 쓰고 있는 건데?"

코우스케가 쓰고 있는 당나귀 머리 가면을 만져 보면서 사카에구치 유토는 감탄했다.

"미묘하게 리얼해서 무섭네…"

머리 전체에 씌우는 모양의, 연극에서나 쓸 것 같은 당나귀 머리다. 어째서 코우스케가 이것을 쓰게 되었냐 하면…….

"내기야."

코우스케는 짧게 내뱉었다. 심사가 뒤틀려 있는 투다.

"무슨 내기?"

사카에구치가 물었지만 코우스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근처에서 킥킥거리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사정을 설명해 줬다.

"기말 끝나고 뒤풀이 때 쓸 돈 걸고 우리 반이랑 7반이랑 내기했거든. 미션 하나씩 반에서 내서 그걸 완료하는 쪽에 몰아주기로. 7반 어느 놈이 냈는지 우린 저거야. 당나귀 머리 하루종일 자정까지 쓰고 있기. 제비뽑기로 정했는데 저 녀석이 걸린 거지."

"아…"

사카에구치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매한 얼굴로 코우스케를 돌아보며 웃었다.

"안됐네. 하필이면 오늘."

오늘이라니? 하고 곁에 선 애들이 묻자 오늘 코우스케 생일이거든, 하고 사카에구치가 대답했다.

"와, 진짜 운 없구나, 이즈미. 어쩌냐. 뭐 먹지도 못할 텐데."
"밥도 못 먹는 거야?"
"저거 쓰고 어떻게 먹냐. 그치, 이즈미?"

코우스케는 기분이 나쁜지 말이 없다. 곤란하네, 생각하면서 사카에구치는 코우스케의 책상 위에 작은 포장 상자를 내려놓았다.

"선물. 때가 좀 안 좋지만."
"……뭐냐?"
"리스트 밴드."

포장을 풀어보니 로고 하나가 박힌 검은색 심플한 손목 밴드가 들어 있었다. 그걸 들고 살펴보는데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어 표정이 안 보이니 좋은 건지 별로인 건지 모르겠다.

"어때? 맘에 들어?"
"응. 고맙다."

덤덤히 대답하고 리스트 밴드를 다시 상자에 집어넣는다. 맘에 든 것 같아서 사카에구치는 안심했다. 코우스케는 꽤나 직설적인 녀석이라 별로인 것은 별로라고 딱 잘라 말한다. 감정 표현도 워낙 드라이해서 최대 인사치레라는 게 “고맙다.” 정도다. (남동생 유이치로와 어찌나 다른지.) 그래도 근본은 괜찮은 녀석이라고 사카에구치는 생각한다. 지금 저 당나귀 머리 쓰고 있는 것도 당장 벗어던져 불태워버리고 싶을 테지만 반을 위해 참고 있는 거니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사카에구치는 장난기를 담아 코우스케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장하네."
"시끄러워."
"그래도 집에 가서는 어떻게 벗을 수 있지 않아?"

위로라도 해 줄까 했는데, 반 애들이 또 키득거렸다.

"남동생 있잖아, 일학년에. 걔가 감시해 줄 거야. 7반 애가 벌써 맛있는 거 사주면서 매수했더라고."

과연, 유이치로의 감시라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매수할 필요까지도 없었을 텐데. 유이치로라면 형의 불행을 냉큼 신나서 받아들였을 테니까. 이 형제 사이는 기본적으로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꽃 같은 누이를 사이에 두고 그러하다.

"렌이 놀라겠다."

당나귀 군은 대답이 없다. 좀 침울해진 듯 보였다. 사카에구치는 쓴웃음을 지었다.


*


수업 내내 당나귀 머리를 쓰고 있었고, 교시마다 선생님들이 무슨 장난을 치냐며 화를 냈고, 그때마다 반 애들이 깔깔거리며 이유를 설명했고, 점심은 굶어야 했고, 다른 반에서 찾아온 여자애들이 꺅꺅거리며 핸드폰 사진을 찍어 갔고, 7반 녀석들이 쉬는 시간마다 들이닥쳐서 어디 견뎌 보라며 비웃고 갔다. 생일인데 코우스케에겐 그야말로 시련의 날이었던 것이다. 가장 열 받았던 것은 바로 남동생인 유이치로의 행태였는데,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수업이 끝나자마자 3학년 교실로 달려와 연행하듯 코우스케에게 딱 붙어 함께 하교한 일이었다. 코우스케는 치미는 성질대로 남동생 녀석을 발로 차주고 싶었으나, 함께 온 천사 같은 여동생 덕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참았다.

"오빠, 괜찮아…? 갑갑하진, 않아…?"

물론 갑갑하다.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쳐 있는 상태다. 그래도 코우스케는 상냥한 오빠답게 대답했다.

"괜찮아."
"조금만, 벗고, 있으면 안 되나…?"
"안 되지, 렌. 저건 규칙이라고. 안 벗게 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아니면 형, 반 애들한테 맞을지도 몰라. 상금 날아갔다면서."

치고 들어오는 남동생의 이죽거림에 주먹이 절로 올라가지만, 또 참았다.

"아― 아― 형 인기가 장난 아닌데? 사람들이 다 우리 쳐다봐."

유이치로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이 녀석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주목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슈퍼스타라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 즐기고 보는 담 큰 녀석인데, 지금 상황에선 그의 형이 굴욕을 당하고 있으니 배나 주목을 끌어모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코우스케는 여기서 렌을 생각한다. 그 애는 시선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데, 거기다 이런 괴상한 것을 쓰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창피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렌을 보니, 과연 귀 끝이 빨개져서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이걸 어째야 하나, 코우스케는 생각했다. 유이치로랑 먼저 보낼까.

"렌, 먼저 갈래?"

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오빠를 올려다봤다. 당나귀 머리라서 오빠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언제나처럼 상냥한 진짜 오빠다. 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 빠랑 같이 갈래…"

하고 그의 손을 꼬옥― 잡아오는 것이다. 가슴이 찡했다. 내 사랑하는 여동생. 지금 저 신나서 방방 뛰고 있는 남동생은 태평양 새우잡이 배에 팔아버리고 싶을 정도지만, 렌이 있다면 그럭저럭 참을 수 있다. 코우스케는 여동생의 손을 꼭 맞잡았다.


*


겨울이라 날이 짧아 다섯 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어두워졌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시선과 비웃음을 받으며 일생일대 가장 끔찍한 하굣길을 경험했던 코우스케는 지쳐 집안으로 들어섰다. 반대로 가장 신나는 하굣길이었던 유이치로는 집안에 들어서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저녁 먹자!” 하고 외쳤다.

"형 생일이라 엄마가 돈까스 사놓겠다고 하셨는데!"

남매의 부모님은 일로 바빠 종종 집을 비운다. 유이치로는 냉동실을 열어 보고 “돈까스 있다!” 하면서 렌을 불렀다. 렌은 부엌으로 가고, 코우스케는 가방을 내팽개친 채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온 상태에서 거실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이걸 앞으로 여섯 시간 반을 더 쓰고 있어야 한다니, 장난해?

"형, 돈까스 튀길까?"

유이치로가 부엌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물었다. 그러고는,

"아차, 형은 못 먹지. 열두 시 땡 하면 먹어야겠네. 캬하하. 완전 신데렐라네, 신데렐라!"

하고는 다시 쏙 들어갔다. 코우스케는 마침 손에 잡히는 것을 그 녀석에게 던져버릴 뻔했다가, 참고 보니 손안에 쥐어져 있는 것은 포장된 선물 상자였다. 손바닥만 하게 작았다. 뭐지? 코우스케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냄비를 꺼내고 기름을 붓는 등 요란한 소리가 나다가, 유이치로가 또 밤송이에서 밤톨 굴러 나오듯이 톡 튀어나왔다.

“참! 여섯 시까지 케이크 찾으러 간다고 했던 거 까먹었어. 얼른 갔다 올게!”

말하면서 타다다 현관으로 달려가 운동화를 꺾어 신다가, 뭐가 생각났는지 부엌 쪽을 보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렌, 형 좀 감시해 줘! 저 말 대가리 못 벗게!"

"응…!" 하고 부엌 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유이치로는 소파에 늘어져 있는 형에게 비죽 웃어보이고는(어떻게 저런 게 태어났는지 몰라. 저런 게 렌이랑 쌍둥이라니.) 현관문을 열고 우당탕 뛰어나갔다. "십오 분 만에 온다!" 집안 쩌렁쩌렁하게 외치고서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녀석이다. 아까 하교할 때도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가려고 여기저기 잡아끌었던 걸 알고 있다. 렌 때문에 참았지만, 막내 여동생이 없었다면 길거리에서 형제간 혈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급격히 피로가 밀려왔지만, 코우스케는 한숨 한 번으로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누이동생이 혼자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렌은 앞치마를 두르고 냄비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냄비에 돈까스를 넣어 튀길 모양이다.

"내가 할게."

코우스케가 말하자, 렌이 뒤돌아봤다. 그러고는 "괜찮아, 오빠는 생일, 이잖아…" 하고 살며시 웃는데, 어쩌면 저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유우, 오기 전에 얼른, 먹게 해줄게……."

오빠는 거기 앉아서 기다리라며 렌은 돈까스를 튀기기 시작하고, 코우스케는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서 누이동생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거실에 선물 있던데."

코우스케가 툭 말을 꺼내자 화들짝 놀라 렌이 뒤를 돌아봤다.

"봤어?"
"별 모양 포장지에 작은 거. 혹시 렌 거야?"
"응… 케이크, 자를 때 주려고, 했는데. 유우가 거기 놔뒀나 봐……."
"뭐야?"
"이어폰…"

하고 렌은 수줍은 듯이 살짝 웃었다.

"오빠, 노래 듣는, 거 좋아하니까. 유우랑 같이, 샀어."

지금 줄까? 하며 당나귀 오빠를 향해 몸을 틀다가,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이 냄비 속으로 퐁당 떨어졌다. “앗, 어떡하지.” 렌이 허둥지둥했다. 코우스케가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렌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일단 불 끄고."

코우스케는 침착하게 집게로 젓가락을 건져낸 다음 설거지통에 휙 던져 넣었다. “어디 다치진 않았지?”

“응. 고마워, 오빠.”
“뭘.”

코우스케는 곁을 떠나지 않고 싱크대에 기대서 여동생을 잠시, 바라봤다. 그 눈동자가 아득히 다정하다.

"선물, 고마워."

말하자, 렌이 웃었다. 사랑스럽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에 닿는 감각이 녹아들 것처럼 부드러웠다. 코우스케는 아찔해졌다. 여기서 껴안으면 저 온몸이 내게 안겨 오겠지…….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렌의 뒤편으로 반질반질한 냉장고 표면에 당나귀 머리를 한 자신이 비쳤다.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정말 못생겼다. 이게 뭔가. 공주님과 당나귀도 아니고. 이 투샷이 가당키나 한지. 과연 유이치로 녀석이 비웃을 만하고 사람들이 수군댈 만하다. 코우스케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미안."
"어? 왜, 오빠…?"
"오늘 창피하게 해서."
"…아닌데……. 나, 괜찮, 았어."

아니, 무리하고 있었던 거 알아. 하굣길 내내 그렇게 빨개진 얼굴로 내 팔에 매달려 있었잖아.

"오늘이면 끝날 거야. 여섯 시간 반만 참아."
"오빠……."

렌이 코우스케의 소맷자락 끝을 꼬옥 붙잡았다. 어쩐지 간절한 얼굴이었다. 나오는 목소리도 간절했다.

"당나귀, 머리도 오빠잖아. 코우, 오빠. 나는…… 그거면, 되는데……."

당나귀 오빠는 여기서 그만, 모든 자제력을 잃었다.

팔을 뻗어 여동생을 끌어안았다.

꽉 힘주어서, 공주님이 숨이 막힐 정도로.

"오, 빠…"

허우적거리는 렌의 귓가에 코우스케가 속삭였다.

"선물, 갑자기 하나 더 받고 싶어졌는데."
"응……. 뭔데…?"
"굿나잇 키스."
"에…?"
"초등학교 때까지 자주 해줬잖아. 자기 전에."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유이치로 등쌀에 그만두고 말았지만.

"생일이니까. 오랜만에."
"으……."

돈까스는 식어가는 기름 속에 둥둥 뜬 채 이미 잊혔고, 십오 분 있다 돌아온다던 남동생 녀석도 머리에서 사라졌고, 아직 여섯 시 조금 넘었을 뿐이니 굿나잇 키스를 할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도 안중에 없고, 당나귀 머리의 저주를 받은 코우스케에게는 지금 여동생밖에는 없었다.

"알았, 어…"

렌을 감싸 안았던 팔을 조금 헐겁게 풀어 주자, 렌이 그의 소매를 잡고 발돋움을 해 왔다.

"아니, 잠깐만.“

코우스케는 다급히 당나귀 머리를 벗어 던졌다. 반 애들 따위 알 게 뭐야. (반을 위한 그의 인내와 관용은 여기까지였다.) 흉물스러운 머리통이 부엌 구석에 굴러가 박히도록 차버린 다음에, 한 손으로 렌의 허리를 감쌌다. 망설이던 렌의 입술이 조그맣게, 쪽, 하고 코우스케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가 고개 숙여 렌의 입술 바로 옆에, 키스했다.

"……에."

여동생은 조금 울상이 되었다. 코우스케는 씩 웃었다. 그 얼굴도 여전히 근사한 코우 오빠, 여서 렌은 가슴이 떨려 죽을 것 같았다. 그건 코우스케도 마찬가지였다.

"아, 죽을 것 같다. 행복해서."

렌을 가슴에 끌어안고 코우스케가 중얼거렸다.

"최악의 생일이었는데, 최고가 됐네."
"……생일, 정말, 축하해, 오빠."
"고마워."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종료 후, 현관문 요란하게 열어젖히는 소리와 신발 벗어 팽개치는 소리와 연이어 들려왔다. 코우스케는 렌을 한 번 더 꼬옥 껴안고는 아쉽게 풀어 주었다. 곧 유이치로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뛰어 들어왔다.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높이 들고서.

"케이크 도착! 렌이 좋아하는 생크림 딸기야. 하마다 형이 덤으로 꽈배기빵 줬다!"

하다가 딱 멈춰 섰다.

"……여기 분위기 왜 이래?"

감 좋은 놈. 과연 야생동물이다.

"렌, 왜 얼굴 빨개? 형은 왜 또 말 대가리 벗고 있어?"

말이 아니고 당나귀란다, 동생아. 그 당나귀 머리는 저 냉장고 쪽 구석에 굴러가 박혀 있고, 렌은 우물쭈물 눈을 들지 못하고 있고, 코우스케는 승자의 웃음을 짓고 있고. 유이치로는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의심의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수상한데……. 형, 렌한테 뭘 어떻게 한 거야?”
“좋은 거.”

간결한 대답에 “허.” 외마디 뱉은 유이치로가 웃는 눈을 번뜩였다.

“형 내일 기대해라. 화끈하게 고자질 해줄 테니까.”
"그러시든지."

상관없다. 코우스케는 이미 최고로 행복한 생일을 맞았으니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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